

첫 번째 사진에는 도산서원의 창건과 훼철, 제단 설치 과정, 복원 필요성이 기록되어 있고, 두 번째 사진에는 복원 사업에 참여한 전국 각지 유림과 문중 인사들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단순한 옛 문서라기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졌던 도산서원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기 직전 상황을 보여주는 향토사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자료명: 도산서원 복원 통문 및 발기인 명단
작성 시기: 1967년 10월
관련 장소: 대전시 탄방동 도산서원
자료 구성: 통문 1장, 발기인 명단 1장
문서 성격: 서원 복원 협조와 참여를 요청하는 유림 통문
제작 방식: 인쇄 또는 등사 방식으로 복제된 배포용 문서로 추정
발행 부수: 확인되지 않음
관련 인물: 만회 권득기, 탄옹 권시
관련 문중: 안동 권씨 후손 및 대전·충청 지역 유림
사진만으로 정확한 인쇄 방식을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글자의 형태와 농담이 비교적 일정하고 여러 사람에게 배포하기 위한 통문이라는 성격을 고려하면 친필 원고보다는 등사·석판 또는 유사한 복제 인쇄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통문은 향교·서원·문중·유림 단체가 여러 지역의 관계자들에게 공동의 일을 알리고 참여를 요청하기 위해 돌리던 문서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다음과 같은 목적으로 작성했습니다.
이번 자료 역시 훼철된 도산서원을 다시 세우기 위해 여러 유림에게 협조를 요청한 복원 추진 통문입니다.
첫 번째 장 오른쪽 상단에는 큰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通文
하단에는 작성 시기를 나타내는
一九六七年 十月 日
이라는 표기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자료가 1967년 10월에 작성된 문서라는 점은 사진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날짜에서 구체적인 일자는 비워 두었습니다. 여러 곳에 배포하면서 필요에 따라 날짜를 기입하거나, 정확한 발송일을 나중에 적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서 첫머리에는
大田市炭坊洞道山書院
이라는 구절이 확인됩니다.
따라서 이 문서의 도산서원은 경상북도 안동의 도산서원이 아니라,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에 있는 대전 도산서원입니다.
대전 도산서원은 조선 후기 학자인 만회 권득기와 그의 아들 탄옹 권시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국가유산 관련 자료에서는 1693년 지방 유림이 두 사람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창건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두 사람의 위패는 도산서원의 사우인 함덕사에 봉안되어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만회 권득기
권득기(權得己, 1570~1622)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입니다.
문서에서는 성명 전체보다
權晚悔
와 같이 성과 호인 만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권득기는 문과에 급제한 뒤 관직을 지냈으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벼슬을 떠나 학문과 후진 교육에 힘쓴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탄옹 권시
권시(權諰, 1604~1672)는 권득기의 아들로, 호는 탄옹입니다.
기존 해석에서 문서의 배향 인물을 ‘서악 권시’라고 설명한 경우가 있지만, 공공기관과 한국학 자료에서는 도산서원의 배향 인물을 만회 권득기와 탄옹 권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식 자료에 따르면 대전 도산서원은 1693년, 숙종 19년에 창건되었습니다.
문서 판독 과정에서는 ‘숙종 18년’이나 ‘갑신년’처럼 보이는 글자가 혼재해 연도에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확인되는 공공기관과 한국학 자료의 창건 연대는 1693년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대전 도산서원은 1693년 지방 유림이 만회 권득기와 탄옹 권시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으로 도산서원도 훼철되었습니다.
다만 훼철 연도는 자료에 따라 표현 차이가 있습니다. 도산서원 관련 공식 해설은 대체로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고 설명하거나, 실제 훼철 시점을 1871년으로 기록합니다.
따라서 단정적으로 한 해만 적기보다는 다음처럼 쓰는 편이 정확합니다.
1868년부터 시행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 과정에서 훼철되었다.
문서 전체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도산서원은 권득기와 권시를 기리며 제사를 지내고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였으나, 서원철폐 정책으로 건물이 철거되었습니다.
이후 지방 유림과 후손들이 서원을 다시 세우려 했지만 재정과 여건이 부족해 오랜 기간 복원하지 못했습니다.
1921년에는 후손과 지역 유림이 옛터에 단을 설치하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노천에 설치된 제단만으로는 비바람을 피하기 어려웠고, 선현을 추모하는 장소로서도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1967년 봄 향사 때 유림들이 의견을 모아 서원을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여러 지역의 유림과 후손에게 참여와 협조를 요청한 것입니다.
원문의 취지를 현대어로 자연스럽게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전시 탄방동 도산서원은 만회 권득기와 탄옹 권시 두 선생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두 선생은 학문과 덕행이 높고 처신이 공평하여 후학의 모범이 되었다. 지방 유림들이 두 선생의 덕을 기려 서원을 세우고 오랫동안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왔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으로 서원 건물이 철거되었고, 유림들은 이를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이후 서원을 다시 세우려 했으나 재정이 부족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옛터에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이어왔지만, 풀이 무성해지고 비바람을 막기 어려워 선현을 추모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이에 금년 봄 향사에서 유림들이 뜻을 모아 도산서원을 복원하기로 하였으니, 여러 유림과 후손들이 한마음으로 협조하여 큰일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란다.
사진의 일부 글자는 접힘과 흐림 때문에 완전한 축자 판독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위 내용은 문서 전체의 핵심 취지를 정리한 번역입니다.
기존 해석 중에는 경신년을 1921년으로 적은 경우가 있었지만, 간지는 정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1920년은 경신년이고, 1921년은 신유년입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국가유산 관련 공식 설명에서는 1921년 후손과 지방 유림이 단을 설치하고 향사를 계속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문서의 특정 간지 판독과 외부 사료의 연도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글자를 억지로 확정하기보다는 다음처럼 정리해야 합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1921년 옛터에 단을 세우고 춘추로 향사를 이어갔다.
이 통문은 도산서원이 실제로 복원되기 직전인 1967년에 작성됐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도산서원은 다음과 같이 복원되었습니다.
즉, 1967년 10월의 이 통문은 이듬해 시작된 본격적인 복원 공사와 직접 연결되는 자료일 가능성이 큽니다.
통문 작성 후 실제로 복원 사업이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계획서가 아니라 도산서원 복원 과정의 출발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장 상단에는
發起人
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습니다.
발기인은 도산서원 복원 사업을 처음 제안하거나 추진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명단에는 여러 인물의 성명과 함께 대전, 회덕, 공주, 청주, 논산 등으로 보이는 지역명이 병기되어 있습니다.
일부 이름은 비교적 분명하지만, 작은 글씨와 옛 한자체 때문에 사진만으로 모든 인명을 정확하게 판독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기존 명단은 그대로 확정해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일부는 실제 글자와 다르게 판독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도산서원이 권득기와 권시를 배향하고 있으므로 안동 권씨 문중과 관련성이 깊은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발기인 명단에는 권씨뿐 아니라 김씨, 이씨, 송씨, 허씨, 홍씨, 채씨 등 여러 성씨가 확인됩니다.
따라서 이 문서를 단순히 안동 권씨 문중 내부 문서 라고만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보다 적절한 표현은 안동 권씨 후손과 대전·충청 지역 유림이 함께 참여한 도산서원 복원 추진 문서라고 보는게 맞습니다.
서원은 특정 문중의 선조를 배향하더라도 실제 건립과 향사에는 지역 유림이 폭넓게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진에서는 전통 한지처럼 보이는 종이에 붓글씨 형태의 글자가 인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직접 붓으로 한 장씩 쓴 친필 원본보다는 등사, 석판 또는 유사한 인쇄 방식으로 제작한 배포용 문서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다만 사진만으로 등사본과 석판인쇄본을 완전히 구분하기는 어렵고 1967년 한지에 제작된 도산서원 복원 통문 인쇄본 또는 등사본으로 보입니다.
사진에서 확인되는 종이의 접힘, 가장자리 변색, 오염과 산화 흔적은 오래된 실물 문서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또한 문서 작성 시기인 1967년과 도산서원의 실제 복원 시기인 1968년·1973년이 서로 연결됩니다. 역사적 내용 역시 공식 기록과 대체로 부합합니다.
따라서 최근에 내용을 만들어낸 모조품일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다만 사진만으로 종이와 먹, 인쇄 재료를 과학적으로 검사한 것은 아니므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자료의 가장 큰 가치는 유명 서예가의 친필이나 미술성보다는 기록성에 있습니다.
도산서원 복원사 자료
1967년 복원 결의와 참여 요청이 기록되어 있어, 1968년부터 시작된 도산서원 복원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대전 향토사 자료
대전 탄방동과 회덕·충청 지역 유림사회를 연구하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유림 조직 연구 자료
발기인의 성명과 출신 지역을 통해 1960년대 대전·충청 지역 유림의 인적 관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중사 자료
권득기와 권시 후손들의 추모 활동과 서원 복원 참여 과정을 보여줍니다.
현대 서원 복원운동 자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지역 유림이 훼철된 서원을 어떻게 복원했는지를 보여주는 근현대 기록물입니다.
이 통문의 정확한 발행 부수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통문은 발기인과 각 지역 유림, 문중, 향교 등에 전달하기 위해 여러 부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배포 후 보관되지 않고 폐기된 경우가 많아 현재 남은 수량은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희소성은 다음처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전체 고문서 시장 기준: 보통
대전 향토자료 기준: 비교적 희귀
도산서원 복원 관련 자료 기준: 희귀 가능성 있음
동일 문서의 현존 수량: 확인 불가
이 자료와 정확히 동일한 1967년 도산서원 복원 통문의 공개 거래 사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국내 고서·고문헌 시장에서는 근현대 향토자료와 문중 자료가 대체로 수만 원대부터 거래되지만, 가격은 연대보다도 지역성, 인물, 완전성, 보존 상태에 크게 좌우됩니다. 현재 코베이옥션에서도 고서·향토자료·탁본·문중자료 등이 수만 원대 이상으로 다양하게 출품되고 있습니다.
이 자료는 통문과 발기인 명단이 함께 남아 있다는 점이 장점입니다.
상태별 참고 가치
| 상태 | 예상 수집가 거래 범위 |
| 오염·찢김이 심하고 한 장만 있는 경우 | 약 1만~3만 원 |
| 통문과 발기인 명단 2장이 함께 있는 현재 상태 | 약 3만~8만 원 |
| 상태가 양호하고 출처가 확인되는 경우 | 약 8만~15만 원 |
| 도산서원 관련 다른 자료와 일괄 구성 | 10만 원 이상 가능 |
이는 동일품의 확정 낙찰가가 아니라, 국내 근현대 향토 문서 시장을 참고한 보수적인 범위입니다.
일반 골동품 수집가보다 다음과 같은 수요자에게 가치가 더 높을 수 있습니다.
이 문서가 작성된 1967년은 도산서원의 복원이 본격화되기 바로 전해입니다.
통문에서 유림들이 복원을 호소한 뒤, 공식 기록상 실제로 1968년 사당과 묘문이 중건되었습니다. 이어 1973년에는 강당과 유생들의 숙소, 대문과 전사청까지 복원되었습니다.
즉, 이 통문은 단순히 “복원하자”는 의견을 적은 문서로 끝나지 않고, 실제 복원으로 이어진 사업의 현장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대전 도산서원은 안동의 유명한 도산서원과 이름이 같지만 서로 다른 서원입니다. 대전 도산서원의 명칭은 탄방동 뒤편의 산을 도산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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